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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로리타: 욕망, 금기, 그리고 인간 본성의 미로

by moonnnnnight 2025.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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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타, 금기의 거울에 비친 인간 욕망 — 인문학적 영화 리뷰

1955년 출간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로리타』는 오랜 세월 금기의 상징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이 금기를 건드린 두 편의 영화가 있다. 1962년 스탠리 큐브릭의 버전과 1997년 애드리안 라인의 리메이크. 이 리뷰는 두 영화 모두를 포함해 ‘로리타’라는 문화 아이콘이 지닌 인문학적 의미,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회적, 심리적 구조를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둔다.

미학과 도덕 사이: “그녀는 나를 파멸시켰는가, 구원했는가?”

‘로리타’라는 이름은 이제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한 인간의 욕망이 부딪히는 윤리와 사회, 법과 예술 사이의 경계선 그 자체다. 험버트 험버트라는 중년 남성이 어린 소녀에게 품은 감정은 단지 ‘금지된 사랑’이라 치부하기엔 복잡하다. 큐브릭과 라인 모두 험버트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두 감독은 전혀 다른 정서의 그림을 그려낸다. 큐브릭의 영화는 더 조심스럽고, 추상적이며 암시적이다. 반면 라인의 영화는 더 정열적이고, 직설적이며 감정적으로 격렬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시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과 영화는 철저하게 험버트라는 남성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리가 보는 로리타는 ‘그가 보는 로리타’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과 인간성, 그리고 이 세계 안에서 소외된 존재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되묻게 만든다.

로리타는 누구인가: 존재와 상징의 간극

인문학적으로 볼 때, 로리타는 단지 한 명의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된 욕망의 아이콘이며, 동시에 현대 사회의 도덕적 위선에 대한 비판이다. 어린 여성의 순수함과 육체적 매혹이 소비의 대상이 되는 시대에, 로리타는 상징이 된다. 그러나 이 상징은 그녀의 실제 ‘존재’를 지워버린다.

험버트는 로리타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로리타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로리타의 이미지’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의 ‘로리타’는 결코 그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 그는 이상화된 형상을 좇지만, 그 형상은 허상이자 왜곡이다.

여기서 ‘욕망’은 라캉적인 개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험버트의 욕망은 결국 자아의 파괴와 로리타의 상실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진정 사랑했는가, 아니면 욕망했는가?”

교육, 권력, 그리고 로리타

로리타와 험버트의 관계는 단순히 개인 간의 감정선으로 보기엔 구조적으로 불균형하다. 험버트는 보호자이자 교사로서 권력을 쥐고 있고, 로리타는 아직 성장 중인 아이다. 이 구조는 미셸 푸코가 말하는 ‘지식과 권력의 얽힘’과 유사하다. 푸코는 교육과 규율을 통해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고, ‘정상’이라는 기준을 강요한다고 보았다.

로리타는 사회의 교육 시스템이나 가족 제도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험버트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 의존성은 곧 억압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로리타는 이중적으로 사회적 시스템과 개인적 욕망의 착취를 동시에 겪는 인물이다.

관객의 위치: 우리는 험버트인가, 로리타인가?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는가? 영화는 교묘하게 험버트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그의 불안, 질투, 고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로리타는 울고 있고, 도망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관객은 이러한 이중 구조 속에서 ‘도덕적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술은 때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도덕의 위장을 벗긴다. 로리타는 그런 예술이다.

로리타 이후의 문화: “이제는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영화”

오늘날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 <로리타> 같은 영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미투 운동 이후, 성별 권력 관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윤리적 경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것은 사회의 진보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이 더 이상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게 되는 위험도 존재한다.

로리타는 불편한 예술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이 영화를 여전히 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구조화하고, 그 구조 속에서 어떤 존재들이 희생되는지를 되묻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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