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 이 영화의 핵심 과학 개념
《테넷》은 기본적으로 엔트로피(entropy)라는 물리학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하자면 엔트로피는 '무질서도' 혹은 '혼란의 정도'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면 → 엔트로피 증가 (질서 → 무질서)
뜨거운 물이 식는다 → 엔트로피 증가
즉, 시간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 과학의 기본 전제다. 우리는 그것을 '시간이 앞으로 흐른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테넷》에선 엔트로피가 '역전된 물체'들이 등장한다. 즉, 그 물체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예를 들어, 총알이 벽에서 튕겨져 나와 총에 들어간다거나, 불이 아닌 얼음이 터지는 장면처럼 말이다.
2. 영화의 기본 설정 — 시간의 역행
《테넷》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는 '주인공(Protagonist)'이다. 그는 시간 역행 기술이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이용해 전 세계를 위협하는 미래의 적과 싸운다. 영화 속 세계에서는 미래 사람들이 현재를 파괴하려고 시간 역행 기술을 보냈다는 설정이다.
시간 역행을 위해선 회전문(turnstile)이라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 장치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엔트로피 방향'이 바뀌어,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경험하게 된다. 이 상태에선 세상이 반대로 움직인다:
바람이 거꾸로 분다
대화가 이상하게 들린다
자신의 움직임만이 정상이지만, 주변은 모두 역방향
이걸 시각적으로 표현한 놀란 감독의 연출은 정말 기가 막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헷갈리게 만든다.
3.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시간 반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테넷을 시간 여행 영화로 오해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시간 여행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시간 여행은 이렇게 된다:
타임머신 → 버튼 누름 → 과거로 이동 → 현재 사람이 과거로 '점프'
하지만 《테넷》에서는 이렇게 된다:
회전문 탑승 → 엔트로피 역전 → 시간을 '거꾸로 살아감' → 과거 도착
즉, '시간을 거꾸로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 테넷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타임머신 SF와는 매우 다르다. 이 영화에선 미래로 가고 싶으면 걍 기다려야 하고, 과거로 가고 싶으면 역행 상태로 거꾸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4. '시간 전쟁' — 영화의 서사 구조
《테넷》은 서사 구조 자체도 시간 역행과 정방향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한 번 보면 누가 언제 어디서 뭐하고 있었는지 헷갈리기 쉽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주인공은 테넷 조직에 들어가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움직임
닐(로버트 패틴슨)은 미래에서 온 인물로, 사실 주인공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음
안드레이 사토르(악당)는 미래와 현재를 잇는 인물. 그가 죽으면, 시간 역행 장치가 작동해 현재 세계가 멸망함
영화 후반부에는 정방향 부대와 역방향 부대가 동시에 작전을 펼치는 전투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말 그대로 시간 전쟁이다. 같은 시간에, 두 개의 시간 방향에서 작전이 펼쳐지는 장면은 놀란 감독의 시간 실험이 정점에 달한 부분이다.
5. 테넷의 진짜 주제 — 과학인가, 철학인가?
이 영화가 단순한 SF 영화가 아니라는 건 명확하다. 테넷은 물리학적 개념뿐 아니라, 운명, 자유의지, 인과관계 같은 철학적인 주제를 건드린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아니면 스크립트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인가?"
닐이 마지막에 "이건 우리의 끝이자, 너의 시작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모든 질문을 압축하는 명대사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루프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다만 그걸 '겪어가고' 있는 중일 뿐이다.
에필로그 — 다 보고도 모르는 영화, 그래서 다시 보게 되는 영화
《테넷》은 설명해도 설명해도 또 어려운 영화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는 놀란 감독의 집요한 창작 욕심과, 우리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한 번 보면 모르는 게 당연하고, 두 번 봐도 전부 알 순 없지만, 세 번 보면 빠져드는 그런 퍼즐 같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 속엔, 놀란 특유의 감정과 철학이 숨어 있다.
《테넷》은 시간을 이용해 세상을 구하려는 이야기이자, 시간 속에서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묻는 영화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 알고 보면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알고 보면 시작이다.
TENET — 거꾸로 읽어도, 순방향으로 읽어도 같은 단어.
이 영화는 그렇게,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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