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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 속 계엄령과 대통령 탄핵: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의 경계선

by moonnnnnight 2025.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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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 속 계엄령과 대통령 탄핵: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의 경계선


1. 서론: 헌정 위기의 두 얼굴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격동의 시대마다 등장한 두 개의 헌법적 장치는, 서로 대조적인 목적과 성격을 지녔다. 하나는 ‘계엄령’이다. 이는 비상사태 시 국가 안보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군대의 통치 권한을 일시적으로 확대하는 조치다. 다른 하나는 ‘탄핵’이다. 이는 헌법을 위반하거나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를 합법적으로 파면할 수 있는 헌정 질서의 마지막 보루이다. 이 두 제도는 각각 국가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고, 어떻게 견제받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본 보고서에서는 한국 현대사 속 계엄령과 대통령 탄핵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시대순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조망하고자 한다.

2. 계엄령의 역사: 군이 지배하던 시대
2.1. 5·16 군사정변과 계엄령의 시작 (1961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직후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국회와 헌법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해 통치권을 장악했고, 2년 뒤 대통령직에 취임함으로써 군정에서 민정으로의 겉모습만을 유지한 권위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이 사건은 계엄령이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군이 직접 정치에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한국 정치의 군사화가 시작되었고, 이는 곧 유신 체제로 이어진다.

2.2. 유신체제와 10월 유신 (1972년)
1972년, 박정희는 ‘북한의 위협’을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국회를 해산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의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선거로 재임할 수 있게 했으며,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부여했다. 계엄령은 이를 강제할 군사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유신체제는 계엄과 권력 장기화를 결합시킨 한국 정치사 최악의 권위주의 체제 중 하나로 평가된다.

2.3. 부마항쟁과 12·12 군사반란 (1979년)
1979년 10월, 유신체제에 반발한 시민들이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부마항쟁’이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확대하고 시위를 강경 진압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다.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월 12일 계엄령 하에서 군사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다. 이는 ‘12·12 군사반란’으로 불리며,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또 한 번의 군사적 도전이었다.

2.4.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계엄령의 폭력성 (1980년)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야당 정치인들을 체포했다. 이에 반발한 광주 시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봉기했고, 군은 계엄령 하에 특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무력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으며, 군에 의한 계엄령이 어떤 형태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가 되었다.

2.5. 계엄령의 종말과 1987년 6월 항쟁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사망으로 촉발된 국민적 분노는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가능성까지 검토했으나, 전 국민적인 저항 앞에 물러나며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이로써 계엄령은 더 이상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어려운 정치적 한계를 드러냈다.

2.6. 2017년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던 2017년 초, 국군기무사령부가 계엄령 선포를 위한 세부 계획을 작성한 문건이 뒤늦게 공개되었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 선포 후 국회 해산, 언론 통제, SNS 차단, 탱크와 병력의 수도권 배치 등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어 충격을 주었다.

비록 실제 실행되진 않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엄령이 다시금 정권 유지 수단으로 검토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사회적 경고가 되었다.

3. 대통령 탄핵: 헌정 질서 수호의 제도적 장치
3.1. 헌법 속 탄핵 제도
대한민국 헌법 제65조는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경우 국회는 탄핵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탄핵이 의결되면 헌법재판소가 이를 심판하며,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다.

탄핵은 단순한 정치적 비판이 아닌, 헌정 질서 수호와 국민 주권 실현의 제도적 수단이다.

3.2.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4년)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며 탄핵 소추를 단행했다.

헌법재판소는 5월에 “선거법 위반은 있었으나 파면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탄핵을 기각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압승했고, 오히려 정치적 반사 이익을 얻었다.

이 사건은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 소추가 현실화된 사례이며,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주목받은 계기였다.

3.3. 박근혜 대통령 탄핵 (2016~2017년)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보도되며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다. 최순실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 열람하고, 국정에 개입했으며, 기업에 부당한 기부를 요구해 미르·K스포츠재단을 운영한 사실이 드러났다.

전국적으로 ‘촛불집회’가 벌어졌고,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탄핵을 인용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된 사례이며, 시민의 힘이 제도적 변화를 이끈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4. 계엄과 탄핵의 정치적 함의
계엄령은 과거 정권들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었으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폭력의 도구가 되었다. 반면, 탄핵은 헌법과 법률 위반에 대해 제도적 책임을 묻는 민주적 장치로, 정치적 성숙의 지표가 되었다.

과거에는 계엄령이 민의를 억압했다면, 오늘날 탄핵은 민의를 반영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둘의 대비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 결론: 시민의 힘이 역사를 바꾼다
한국 현대사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엄령이 난무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헌법의 정신과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탄핵이라는 제도가 정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국민의 저항, 연대, 그리고 참여가 있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단지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계엄령과 탄핵이라는 두 극단적 사례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분명한 교훈을 얻는다: 헌정 질서는 권력이 아닌 시민에 의해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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