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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좋은것들

거친 콘크리트 속의 인간성. 영화와 건축, 그 경계의 서사 브루탈리스트

by moonnnnnight 202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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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콘크리트 속의 인간성. 영화와 건축, 그 경계의 서사 브루탈리스트
2025년,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된 브래디 코베 감독의 신작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는 단지 건축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양식을 하나의 미학적, 철학적 상징으로 삼아, 20세기 중반의 이주, 전쟁, 이념, 그리고 예술가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복합적으로 그려낸다. 감독의 정밀한 연출과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 펠리시티 존스의 섬세한 감정 연기는 이 영화가 단순한 전기적 서사가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는 인문학적 통찰을 담은 작품임을 보여준다.

이민자 예술가의 초상: 라즐로 토스의 세계
영화는 헝가리 출신 건축가 ‘라즐로 토스’가 1950년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겪는 삶과 예술의 여정을 따라간다. 라즐로는 유럽에서의 전쟁과 상실을 뒤로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만, 그가 꿈꾸는 건축의 세계는 당시 미국 사회의 보수성과 상충한다. 그는 콘크리트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회복을 담아내려 하지만, 자본과 정치, 제도는 그의 창조성을 억제하고 제약한다. 라즐로의 이상은 곧 좌절과 타협의 과정을 겪으며 점점 변화해간다.

라즐로를 연기한 애드리언 브로디는 ‘피아니스트’에서 보여줬던 깊고 침잠한 연기의 결을 다시 한번 선보인다. 고집스럽고 때론 고립된 예술가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며,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그의 아내 ‘에르지 토스’ 역의 펠리시티 존스 역시, 이민자 가족이 겪는 현실적 고통과 정체성의 혼란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녀는 라즐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과 ‘예술’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는 인물로, 영화의 감정적 균형을 잡아준다.

브루탈리즘: 거칠지만 정직한 건축 언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브루탈리스트’는 단지 주인공의 직업적 정체성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 전체의 미학적, 철학적 핵심이다.

브루탈리즘(Brutalism)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70년대까지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확산된 건축 양식으로, 프랑스어 ‘béton brut’(거친 콘크리트)에서 유래한다. 이름 그대로 이 양식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 구조적 진실성과 기능성을 강조한다. 장식이나 외적 아름다움보다는 내부 공간의 용도와 구조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자체로 일종의 저항적 양식이었다.

이는 전후 복구기의 사회주의적 이상, 복지국가의 가치,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삶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었다. 당시 많은 공공기관, 주거단지, 학교 등이 브루탈리즘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단지 미학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적 이상과 직결된 건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브루탈리즘은 ‘차가운 건축’, ‘비인간적이고 무거운 건축’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과격한 외형, 유지보수의 어려움, 그리고 도시 미관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철거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들어 브루탈리즘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능성, 진정성, 그리고 자본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말이다.

미학과 메시지: 브루탈리즘을 담은 영화의 형식
브래디 코베 감독은 단순히 브루탈리즘 건축을 배경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영화의 연출 구조와 장면 구성을 통해 철저히 구현한다. 영화 속 장면들은 대체로 정적이고,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보다 공간의 질감을 따라간다. 긴 고정 숏, 대칭적 구도, 황량한 색조는 건축물의 질감과 인물의 감정을 병치하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특히 ‘공간이 인물을 정의한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라즐로가 설계한 주거 단지, 도서관, 공공 공간들은 모두 그의 이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사회적 갈등의 무대가 된다. 콘크리트로 구성된 벽은 그 자체로 인물들의 감정을 반영하고, 구조는 감정의 비유가 된다. 이처럼 건축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주체’로 기능한다.

예술, 이념, 그리고 존재
브루탈리스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어떻게 시대와 타협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라즐로의 이상은 점점 시대와 부딪히며 현실과 타협해간다. 그의 초기 설계는 기능과 공동체 중심의 공간을 상상하지만, 결국 그 역시 정치적 압력과 자본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그는 공공 건축 대신 부유층의 저택을 설계하게 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예술적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이는 단지 건축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갈등이며, 심지어 우리 모두가 사회 속에서 겪는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매우 보편적이고도 철학적인 작품이다.

결론: 브루탈리즘이라는 영혼, 영화라는 형식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는 브루탈리즘 건축이 가진 철학적 무게를 깊이 있게 영화라는 매체로 번역해낸 보기 드문 작품이다. 단지 건축가의 삶을 따라가는 전기영화가 아니라, 건축이 담아낼 수 있는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철학을 다룬다.

라즐로 토스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모든 시대의 예술가, 창작자, 혹은 신념을 가진 인간의 초상이다. 그가 설계한 공간, 그가 살아가는 구조물, 그가 마주하는 콘크리트 벽은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그 속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정체성의 상징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도심의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도 다시 보이게 된다. 그 거칠고 투박한 표면 너머에, 수많은 사람들의 신념, 희망, 좌절이 스며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브루탈리즘이며, 영화 브루탈리스트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깊은 감정의 지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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