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신 짧은 영상? 우리는 왜 더 이상 긴 글을 못 읽게 됐을까
1. 활자의 시대에서 스크롤의 시대로
과거의 우리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데미안』 한 권을 두고 친구들과 진지하게 토론하기도 했고, 지하철에서 조용히 펼쳐든 시집 한 권에 하루치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느림의 미학이 살아있던 그 시절, 긴 글은 정보를 넘어서 ‘경험’이자 ‘공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문장을 따라가기도 전에 손가락은 화면을 내린다. 책의 목차를 훑는 대신, 영상의 썸네일만 보고 ‘이건 재미없겠군’ 하고 넘긴다. 뉴스 기사도 1분 요약 영상으로 대체되고, 긴 글을 클릭한 사람은 “누가 이걸 다 읽냐”고 댓글을 단다. 심지어 이 글조차 ‘너무 길다’는 이유로 끝까지 읽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콘텐츠의 형식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감각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대체 우리는 왜 긴 글을 멀리하게 되었을까?
2. 뇌는 속도에 중독된다
디지털 시대, 특히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이후 우리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접한다. 수천 개의 앱과 알림이 우리의 집중을 깨트린다. 짧은 자극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뇌는 '빠른 것'에 익숙해지고 '느린 것'에 인내하지 못하게 된다.
인지심리학자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우리는 더 똑똑해진 것이 아니라, 더 얕아졌다”고 말했다.
짧은 정보를 빠르게 소비할수록, 뇌는 깊이 있는 사고를 위한 연결을 만들지 못하고 표면만 스치게 된다. 긴 글을 읽는 것은 뇌에게 '근력운동'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매일 ‘카페인 음료수’ 같은 정보만 마시고 있는 셈이다.
3. 사라진 여백의 미
긴 글은 여백이 많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천천히 따라가고, 글쓴이의 숨결을 느끼며 독자가 나만의 속도로 ‘해석’하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는 마치 풍경화를 감상하는 것과 같다. 빠르게 훑어볼 수 있지만, 오래 머무를수록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이 보인다.
하지만 쇼츠나 릴스, 틱톡 영상은 그런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극은 빠르고 강해야 하며, 3초 안에 ‘웃기거나 충격적이거나 감동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반복된 시청은 우리에게 ‘기다림’이나 ‘해석’이라는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문장의 숨결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 채 “핵심이 뭐냐”는 질문만 반복한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이 아닌 요약본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우리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긴 글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활자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사유이고, 감정이며, 내면과의 대화다. 긴 글은 독자에게 ‘시간을 쓰라’고 요구한다. 반면 짧은 영상은 ‘시간을 잊게 만든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는 능동성과 수동성이다.
책은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너의 삶과 연결지을 수 있는가? 하지만 짧은 영상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간다. 감정을 만들어주고, 웃음을 던져주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익숙해졌고, 그만큼 ‘생각하는 나’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
생각 없는 소비는, 결국 감정 없는 삶으로 이어지기 쉽다.
5. 그러나 ‘깊이’는 여전히 그리워진다
모두가 짧은 콘텐츠에 몰입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 콘텐츠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극적이고 피상적인 콘텐츠에 지친 이들은 점점 ‘깊은 콘텐츠’를 찾아 떠나고 있다.
독립 서점과 북클럽이 다시 인기를 얻고,
유튜브에서도 1시간 이상 분량의 영상 에세이나 다큐멘터리가 꾸준히 조회수를 올리며,
‘몰입 독서 챌린지’나 ‘디지털 디톡스 캠프’ 같은 활동들이 등장한다.
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깊이 있는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증거다. 결국 우리는 자극의 홍수 속에서, 여전히 사유와 감동을 찾고 있는 것이다.
6. 기술과 인간 사이, 선택의 지점
우리가 기술의 진보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AI는 글을 요약해주고,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 내 취향을 파악한다. 하지만 그 속도가 우리의 ‘사유’와 ‘감정’을 대체할 수는 없다.
기술은 중립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쇼츠도 필요하고, 릴스도 유용하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책 한 권, 긴 글 한 편, 또는 천천히 감상하는 영화 한 편이 있다면, 그것이 삶의 깊이를 만들어줄 것이다. 결국 콘텐츠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다.
7. 결론: 우리는 되돌아갈 수 있을까?
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느림의 회복’이며, ‘나 자신과의 대화’다.
그건 남을 따라가는 정보 소비가 아니라, 나만의 시선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스크롤을 멈추고, 문장에 잠시 머물러 보자.
그 안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세계가, 감정이, 철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너무 적게 느끼고 있다.”
《The Age of Overwhelm》 중
긴 글이 귀한 시대. 당신이 이 글을 다 읽었다면,
당신은 이미 ‘느리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