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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좋은것들

영화 속 건축: 영화에서 건축의 역할과 상징성

by moonnnnnight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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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건축: 영화에서 건축의 역할과 상징성
"건축은 고정된 시(詩)이고, 영화는 움직이는 건축이다."
—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우리는 영화를 보며 인물의 표정과 대사에 집중하지만, 그 인물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공간'에서 행동하고 있는지는 종종 지나치곤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건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며, 사회 구조를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장치이고, 때로는 하나의 독립된 캐릭터로 기능하기도 한다.

건축은 ‘공간’을 구성하며, 공간은 곧 삶이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건축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상징성과 정체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건축은 인물이다: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심리와 계급
《기생충》 (2019) – 계단과 수직구조의 은유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계단이라는 건축적 장치를 통해 사회적 위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박 사장 가족의 집은 지상에 존재하는 고급 주택이며, 정원과 유리창을 통해 빛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반면,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지면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창문 밖 풍경은 사람의 다리와 쓰레기, 그리고 오물이다. 인물들이 계단을 내려가면 하층민의 세계가, 올라가면 상류층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수직적 공간 구조는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라, 계급 갈등의 시청각적 은유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박 사장 집에서 도망치던 기택 가족이 계단을 끝없이 내려가는 장면은 그들이 얼마나 아래로, 그리고 얼마나 ‘다시’ 추락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건축은 여기서 단순한 공간이 아닌, 계급의 지도(map)로 기능한다.

2. 공포, 불안, 광기의 공간화
《샤이닝》 (1980) – 오버룩 호텔이라는 미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등장하는 오버룩 호텔은 외딴 산속에 위치한 거대한 호텔이다. 이 공간은 점차 주인공 잭의 정신이 무너져가는 과정과 병치된다. 복잡한 구조, 반복되는 문양의 카펫,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들은 관객에게 시각적인 불안감을 준다.

특히 호텔의 건축 구조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예컨대 창문이 존재할 수 없는 내부 방에 자연광이 들어오거나, 복도의 동선이 어긋나게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의도된 건축의 불합리’는 인물의 정신적 미로를 시각화하며, 공간이 인물의 내면과 감정의 기복을 대변함을 보여준다.

3. 도시는 권력이다: 시스템과 건축의 공모
《메트로폴리스》 (1927) – 기계문명과 계급의 수직성
프리츠 랑의 걸작 《메트로폴리스》는 건축과 도시계획을 통해 산업화 시대의 디스토피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 도시는 상류층의 초고층 빌딩과 하층민이 사는 지하 기계실로 분리되어 있으며, 이는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계급구조 자체이다.

거대한 기계들이 움직이는 공간은 인간이 아닌 기계의 리듬에 맞춰 조율되고, 인간은 그 안에서 부속품처럼 전락한다. 건축은 이 지배-피지배의 구조를 물리적으로 드러내며,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제공한다.

4. 꿈, 환상, 무의식의 구조화
《인셉션》 (2010) – 무의식을 설계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에서 꿈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현실이 아닌 잠재의식의 세계를 구축한다. 영화는 도시의 거리들이 180도로 접히는 장면, 계단이 위로 올라가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페넬로프 계단’을 통해 물리적 법칙이 무시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현실적 공간은 단순히 시각적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작동방식을 건축적으로 시각화한 결과다. 꿈을 건축한다는 개념은 결국, 기억·욕망·공포 등 심리적 요소들이 물리적 구조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관객은 건축을 통해 무의식의 구조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다.

5. 건축은 정체성이다: 기억과 문화의 저장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 빌라의 숨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탈리아 북부의 한 빌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풍스러운 집은 두 주인공의 사랑이 싹트는 공간이자, 그들의 감정 곡선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장소다.

높은 천장, 석조 바닥, 오래된 책과 음악이 가득한 서재는 엘리오의 감성적 세계를 반영하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공간은 인물의 기억으로 남는다. 건축은 시간성을 담은 그릇이며, 정체성의 형성과정에 있어 물리적 배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6. 건축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
《로마》 (2018) – 정치적 혼란 속 ‘집’이라는 중심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가정부 클레오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에서 그녀가 일하는 중산층 가정의 집은 개인과 시대가 만나는 중심지다.

흰 벽, 중정, 정갈한 바닥은 세련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내부의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외부에서는 정치 시위와 혼란이 휘몰아치고, 내부에서는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집이라는 건축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인간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건축은 시간의 정착지이자 무너지는 질서의 상징이 된다.

마무리하며: 건축을 읽는 영화 감상
우리는 영화 속 건축을 단순한 무대로 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물의 성격을 말하고, 시대의 흐름을 암시하며, 때로는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건축은 움직이지 않지만 말하고, 정적이지만 서사를 품는다.

건축을 통해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 배경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기호와 상징을 해석하고, 더 깊은 층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다음에 영화를 볼 때, 인물의 뒤에 있는 벽과 천장을, 창과 계단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그곳에는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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