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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공간

벙커침대 위엔 먼지보다 오래된 내가 쌓여 있었다

by moonnnnnight 2025.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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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벙커침대가 있다. 정확히는,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지만 사실상 존재감은 없다. 애초에 이 침대를 사던 이유는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책상을 침대 아래 두고, 침대 위에서 자면 방이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름 "자립"의 첫 상징이었다. 전에 집에 살던 시절, 내 방에서 가장 크고 비싼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씩 어긋났다. 이사하고 나서는 침대 위로 올라가는 게 점점 귀찮아졌고, 계단은 삐걱거렸고, 이불을 개는 일은 거의 예술 행위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2층은 창고가 되었다. “일단 올려두자”는 물건들이 쌓였고, 그 위에 먼지가 쌓였고, 그 위에 계절이 지나갔다.

가끔 침대 밑 책상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그냥 먼지 더미가 아니라, 나의 어떤 시기, 기대, 혹은 방치된 계획이 올라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험 공부하겠다고 붙여놓은 포스트잇, 누가 줬는지도 모를 편지, 유통기한 지난 비타민, 포장도 안 뜯은 다이어리. 지금의 나는 그 다리를 올라갈 이유도 없고, 올라가도 무얼 할지 모르겠다.

벙커침대는 더 이상 침대가 아니었다. 그건 구조물이었다. 과거의 계획과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혹은 그냥 그 사이에 낀 철제 잔해물.

치울까 말까 고민을 한참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치우지 못했다. 그냥 침대를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있었던 나의 허세, 시도, 열망 같은 걸 몽땅 끌어안고 쓰레기장으로 끌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무거웠다.

가끔은, 삶이 이렇게 물건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게 이상하게 짜증나면서도 위안이 된다. 잘 쓰지 않는 것들, 올라가지 않는 곳들, 다시 읽지 않는 메모들. 그 모든 게 여전히 내 방에, 내 삶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언젠가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가서 침대도 정리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조금 더 쌓아둘래. 먼지도, 기억도, 그 시절의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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